삼인대(三印臺)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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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5-08-26 09:42 조회31회 댓글0건본문
삼인대(三印臺)란
조선 시대에 순창 군수 충암沖庵김정金淨[1486~1521], 담양 부사 눌재訥齋박상朴祥[1474~1530], 무안 현감 석헌石軒유옥柳沃[1487~1519]삼인이
소나무에 관인을 걸고, 폐위된 중종의 비 폐비 신慎씨의 복위를 결의한 곳이다.
‘삼인’은 이들이 상소를 결의할 때 삭탈관직을 각오하고 직인(職印)을 풀어 소나무에 걸어두었다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1506년(연산군 12)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등은 연산군의 처남으로 반정에 반대한 신수근慎守勤과 그의 형제들을 죽이고,
폭군 연산군燕山君을 몰아내어 중종中宗을 추대하였다. 그리고 반정에 성공한 박원종 등은 신수근의 딸인 중종의 비 신씨를 폐출시켰다.
1515년(중종 10)중종의 두 번째 왕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사망하자 김정, 박상, 유옥은 중종의 비 신씨를 복위시키기 위하여,
관직 삭탈은 물론 죽음을 각오하고 상소문을 올렸다. 그런데 당시 무안 현감인 유옥에게는 늙은 어머니가 있었으나 다른 형제가 없었다.
김정과 박상은 “우리는 형제가 있어 죽더라도 다른 형제가 부모님을 모실 수 있지만 그대는 만약 불행한 일을 당하면 노모를 봉양할 사람이 없으니
그대의 이름을 빼는 것이 옳다”하여 유옥의 이름은 적지 않았다 한다. 세 사람이 올린 폐비 신씨 복위 상소는 결국 김정과 박상은 유배되었다.
그리고 183년이 지나서 1698년(숙종 24)에 신규의 복위 상소가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233년이 지난 1739년(영조 15) 유생 김태남의 상소로 영조는 신씨를 복위시키고
단경端敬라는 시호를 추상하고, 휘호를 공소순열恭昭順烈이라 하였으며, 능호를 온릉溫陵이라고 하였다.
단경왕후의 신주는 태묘의 중종 실에 신주의 위치는 중종의 ‘원후元后’, 즉 첫째 부인 자리에 놓였다.
1744년(영조 20)에 삼인의 행적을 기리고자 순창군의 선비들이 발기하여 삼인대비三印臺碑를 세웠다.
비문은 이재李縡가 지었으며, 민우수閔遇洙가 글씨를 썼고, 유척기兪拓基가 전액篆額을 썼다.
[연원]
1994년에 김정, 박상, 유옥 세 분의 후손(경주 김씨, 충주 박씨, 문화유씨)들과 순창 유림들이 삼인문화선양회를 구성하여,
삼인문화선양회 주관으로 1995년부터상소를 올린 날인 음력 7월 30일에 강천산 군립공원의 순창 삼인대에서 제1회 삼인문화제를 개최하였다.
우리 거창 신씨는 2002년 제8회 행사부터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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